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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12:40 리뷰/뉴스리뷰
박경신, 방통 심의위원의 블로그에 게제된 '성기노출' 그림이 올라오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외설이라는 입장과 예술이라는 입장이 대립하면서 전자는 자격론을 후자는 무식성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무식성의 이면에는 더 중요한 요소인 표현의 자유, 좀 더 구체적으로 한다면 언론 출판의 자유를 갈구하는 내용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박경신씨의 블로그에는 검열자일기라는 부분이 있다.  보통 국가기관이 공권력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게시자의 의견을 묻지않고 글을 삭제해버리는 불합리한 현상과 위법성을 언급한다.  여기까지는 그런데로 좋았지만 최경태작가의 화보와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남성성기가 그려진 그림을 올렸는지, 혹은 사진을 올렸는지 지금은 수정이 되어있어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공권력에 의해 자행되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불합리를 지적하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성적 표현"이라는 국지적인 문제로 이슈의 중요성을 스스로 반감시키면서 문제제기가 된 것이다.  박경신이라는 이름이 사이트에 오르고 난 뒤 올라온 블로그의 내용을 보면, 조금은 어이없는 글도 있다.  대학 등록금의 문제에 대한 내용이 그렇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최경태작 코리아판타지 '92/눈을 떠라 '90/나는야 자랑스런 대한의 아들 '92

요한 것은 자유이다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자유라는 것은 매우 공허한 말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인 자유라는 것은 향유할 수 없는 개념의 영역이다.  그래서 모두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자유와 의무"라는 두 단어가 붙어 다닌다.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 의무라는 말에 경기를 하는 것은 그 의무가 외부로 부터 주어진 또 다른 속박의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의무라는 단어는 "자율적인 통제기제"로 보는 것이 더 적합니다.  자율적인 통제기제를 상실한 경우- 그것이 합리적이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수용가능한 법이 있다면- 법과 같은 강제기제를 통해 제약을 가하게 된다.  문제는 수용가능한 상식이 아니라 이익과 연루되어 왜곡된 상식으로 전환되면 강제기제는 편향성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자율적인 통제기제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인간으로써 인정을 받는 것이다.  자율적인 통제기제에 오류가 발생하게 되면 짐승만도 못한 존재일 뿐이다.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을 인간과 격리시키는 것이 감옥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을 격리시키는 감옥이라는 구조는 초기 광인과 사회적 부정응자를 격리시키는 것에서 정권의 유지에 위협적인 잠재적 집단을 광인으로 몰아 집단 수용하는 시설이 되어간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강제기제와 강제기제에 의해 지목된 인원을 격리시키는 구조로 변질된 것이다.  자의적으로 변질된 강제기제에 저항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철옹성으로 부터 자유를 요구하면서 대립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권이라는 것도 모호한 추상성을 가지게 된다.  관료주의의 행정형태에서 추상적이지만 물리력을 가지고 있는 권력이 단순한 강제기제가 아니라 억압기제로 작용을 하지만, 그 억압기제를 깨기 위해 핵심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현재 인간들은 "성" 밖에서 주변을 맴돌다 스스로의 족쇄에 갇힌 개인화된 "카프카"이다.  그래서 더욱 더 자유를 갈망하고 원하는 존재가 되거나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지상낙원인양 가상세계 속에서 부스러기같은 작은 이익에 집착하면서 자기만족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극한의 대립은 중간 매개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기제로써의 국가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대립은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한국과 같은 경우 억지로 만들어 낸 비이데올로기적 흑백논쟁적 대립이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좌우논쟁인 것처럼 동색끼리 손가락질을 하고 참을성을 고갈시키면서 소모적인 감정대립으로 변질하도록 조종되고 있다.  서구의 고도로 왜곡된 정치체계가 자기합리화를 위해 개발된 기제들을 재빠르게 적용하면서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개인과 집단의 대립을 만들어냄으로써 권력의 핵심은 1차적인 공격의 화살을 맞지않는 전형적인 Devide and Rule의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회된 표적과 억압의 확대
상호간에 소모적인 대립을 만들어 내는 Devide and Rule은 지역감정을 부주키는 요소가 된다.  지역감정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써 온 고전적인 정치관행이고 박정희 정권시기에는 좌익이라는 단어와 지역감정을 교묘히 결합시켜 비합리적 지배를 합리화하고, 시대적 요구인 탈빈곤이라는 경제개발의 당위성으로 통제와 억압을 정당화한다.  그러한 악습은 지속적으로 현재까지도 유용하다.  현재는 경제개발이라는 당위성보다는 배분의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기 때문에 경제적인 당위성이 약화되어 있어 사상적 대립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대립을 더 양극화하는 것이 무능과 부패를 연장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양극화를 강화하는 방법은 언론의 통제가 있을 수 있다.  언론의 통제가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역할을 담당하면 소문에 의존하는 루머통이 발달하게 된다.  루머통이 발전하게 되면서 작은 일들이 과장되고 과장된 내용들은 더욱 더 힘을 받게 된다.  대립은 더욱 더 극단화되면서 소모성 말장난들이 늘어가게 되고, 논쟁도 아닌 말장난이 심화되면서 개인 혹은 집단간에 욕설과 욕설에 준하는 단어들을 배설하면서 기력을 소진하게 된다.  물론 언론의 통제를 통해 사실에 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메세지를 반복 주입하여 쇄뇌시키고 왜곡된 가상을 현실로 믿도록 하는 작용이 그 중심에 있지만, 역시 개인간의 소모적인 기력쇄진을 만들어 내는 최적의 툴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언론의 통제는 확대된 억압을 확대재생산하고 그것에 무감하게 만드는 훌륭한 도구이면서 소모적인 대립에서 저항의 대상을 개인, 집단 사이의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축소시키는 툴로써 작용한다.

찮은 문제로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방기제
억압적 통제기제들과는 달리 개방되는 것들이 있다.  대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제들에 대해서는 통제가 아닌 개방을 원칙으로 삼는다.  정권에 위협적인 요소가 있을 때마다 3S와 관련된 사건과 내용들이 표피로 떠오르는 것은 개방기제를 확대하는 것이다.  억압기제 이면에는  무능과 부패한 정권과 권력을 유지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또 다른 전략이 개방기제의 확대이다.  현재 누적된, 혹은 새로이 쟁전화될 수 있는 정치 사회적인 이슈를 무마하기 위한 개방기제의 활용이라는 전략의 하나가 섹스에 관련된 박경신의 블로그라고 할 수 있다.  여파는 물론 서태지-이지아건만큼의 폭발적인 쏠림현상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어찌되었든 또 다른 쏠림을 만들어 내기위한 노력의 일부를 보여주는 단서이다.  이것을 사회이슈화한 측에서 볼 때, 잃는 것은 없고 남는 것만 있는 좋은 장사이다.  첫째로, 억압기제를 통한 정당한 언로의 폐쇄성을 만들어 내는 정부와 권력층은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성적 담론의 이면으로 감춰지고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둘째로, 결국 방통심의위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은 성적 담론에 국한된 것이고 잇권과 권력의 남용이라는 면은 전혀 부각되지 않았다.  셋째, 성적 표현의 개방을 요구하는 수준의 표현의 자유를 야당 성향 지식인이 요구한다는 것으로 축소시키켜, 야당성향의 지식인을 도덕적으로 헤이한 변태적 성향의 존재라는 올가미를 만들기에 최적이라는 점이다.  잡년행진을 왜 정부에서는 소고기 수입반대 시위 때와 같은 억압적 대처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정치적 성향이 배제된 성적 대립을 조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권력이 바라는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흐르고 있기에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박경신의 블로그에 있는 검열일기에는 선전 찌라시와 성문제와 같은 주변문제에 대한 심의는 있었을지 몰라도, 다른 핵심적인 심의활동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아마 심의위원회의 존재가 불필요할 정도로 하는 일이 없거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거나 최약의 경우는 그가 역시 주변적인 사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거나 이 셋 중의 하나이다.  블로그의 글들도 학문적 치열함을 보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이 세가지 모두가 적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인들이 만든 시덥지않은 연구소의 소장들이 허접 쓰레기를 배설하고 기자는 그것을 집어먹는 또 다른 허접의 굴레 속에 빠져있는 미래가 보이기는 하지만, 박경신 블로그에서는 역사와 민중과 민주를 팔아먹이면서 너스레를 떨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좀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박경신씨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의 글은 도마 위에 올랐고 단기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역시 권력에 의한 표현의 자유의 억압이라는 중요한 사안을 성적 표현의 구속이라는 국지적인 이슈로 추락시키면서 사회이슈를 중화시키고 결국 도덕적 헤이와 난잡한 지식인이라는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가장 철저히 놀아난 소위 지식인 진중권
재간둥이 진중권, 그의 비판의 칼날은 무뎌졌는가?  그에게 재간은 있었지만, 원래 칼날이 없었다.  박경신 블로그에 대한 촌평은 재간으로 뭉쳐있다는 것까지 부인할 수 없다.  "성나라당......성추행 전문......청소년 유해단체"  지식도 출중하다.  미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어디서 그런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알고 있었는지 주옥같은 그림들을 보여준다.  미적 감각이 임재범 나찌복장 수준이어서 그런지 낸시랭 수준도 안되는 행위도 예술로 보이는 미적 감각에 놀라고,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지 않고 그림만 퍼나르는 수준을 보고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언급없이 성기 주변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의 재기발랄함이 스스로 의도된 희생양을 자처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피가소에게 왜 난해함의 극단에서 표현을 하려고 했냐는 질문에 인기가 좋아져서 좋았고, 평론가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해서였다는 인터뷰 내용이 기억난다.  권력의 핵심에서 본다면 정말 의도대로 잘 따라주고 있다는 생각에 수십번 절을 하고도 남을 정도이다. 

제는 좀 더 정확히 표현을 할 시기
부조리와 비합리에 저항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자신의 직업이 되었건 천직이 되었건 소명이 되었건 자신이 속한 부분에서 꾸준히 나름대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중심을 향해 앞으로 전진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향하는 처절한 절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왜 필요한지를 서로 공유하고, 최종의 목표가 같다면 그 목표를 향하는 길에 함께 서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자신의 셀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역량을 매꿔줄 사람들과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해 진 것이 현실이다.  사소한 것으로 중요한 것을 덮어버리는 것도, 중요한 사안을 사소한 배설거리로 만드는 것 모두 무의미한 일이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날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먼저이다.  알을 깨고 나와서 잘못된 현상의 근원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무능한 정권과 무능함을 억압과 분열로 유지하려는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비판이 선행될 필요가 더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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